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구라 신페이 (문단 편집) == 영향 == 소개만 보면 식민지 조선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평범한 일본인 학자처럼 보이지만, 이 사람이 근현대 한국어학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1920년에 《조선어학사》(朝鮮語学史)를 펴냈고, 교수로 재직하던 1929년에는 한국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인 〈향가 및 이두의 연구〉(鄕歌及吏讀의 硏究), 1944년에는 《조선어 방언의 연구》(朝鮮語方言の研究)를 펴내었다. 한국의 국어학과 고전문학을 연구하여 성과를 낸 학자이다. 오구라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원을 받아 [[한국어]]를 연구하였다. 총독부는 다양한 학술영역에서 한반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식민지배에 활용하였다. 오구라의 연구는 초기 연구이므로 현대 국어학계 입장에서 보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투리|방언]] 연구의 경우, 오늘날에는 방언의 특성상 음운에 훈련된 전문가가 현지에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구라 신페이는 각지의 교사나 지식인에게 우편으로 자료수집을 의뢰하고, 그들이 보내 온 간접자료로 연구하였기에 신뢰성이 부족하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오구라 이후로 전국적인 방언조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오구라가 만든 방언지도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향가]] 등 고전문학 연구에도 족적을 남겼다. 의외로 향가의 초기연구는 조선인 학자보다는 일본인 학자가 주도하였는데, 향가의 특징인 [[향찰]]과 일본의 [[만요가나]]가 유사하다고 관심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본래 언어학자인 [[양주동]] 박사가 향가를 비롯한 고대문학을 연구한 계기가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인데, 민족의 옛 문학을 연구한 사람이 일본인이란 사실에 반발심을 느꼈다는 [[카더라]]가 있다. 실제로 오구라 본인도 결국은 일본인인지라, 일제 식민지배 자체에는 반감을 갖지 않았고,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할 시절 조선인 제자들에게 조선인과 일본인의 상하관계를 강조하는 어그로를 끈 전적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오구라는 지식인으로서 [[일선동조론]]과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비판했고, 그가 초기 한국어학의 개척자로서 한국어학은 물론 한국사학·한국문학에까지 기여한 업적은 무시하기 어렵다. 오구라 신페이의 연구는 70년 전 결과물이기도 하다 보니 오늘날에는 많은 부분이 새로운 연구성과에 의해 대체되거나 보충되었다. 하지만 근대 초기 국어학 연구성과까지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국어학이나 한국 고전문학 입문서나 개론서에 오늘날까지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여담으로, 엉뚱하게도 본의 아니게 현대 한일 간의 [[독도 분쟁]]에 관여하게 되는데, 전라도에서 '[[돌]]'을 '독'으로 발음한다는 걸 밝혀내어 현재 [[한국]] 측에서 대한제국 칙령에 등장하는 '석도' -> 돌섬 -> 독섬 -> '독도' 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오구라의 연구를 이용하기 때문. [[분류:1882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도쿄대학 재직]][[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센다이시 출신 인물]][[분류:일본 제국의 인물]][[분류:일본의 언어학자]][[분류:한국학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